캐나다와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너무나 많이 상이하다. 구조적인 부분에서, 대입시험의 비교적 낮은 우선순위까지 두 나라가 교육에 있어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학생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고, 그래서 많은 학부모들이 유학을 선택한다. 하지만 표면적인 차이와는 달리, 나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육에선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군대식의 교육방법과 항상 만점을 받는 학생이 관심을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공부 잘하는 학생은, 수 개의 학원을 다니고, 학교 진도에 항상 앞서나가고 있으며, 살인적인 학교-학원-잠 스케줄을 소화하는 생활을 십수년간 하게 된다. 좋은 고등학교에 진출하고, 서울대 의대나 법대에 진출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한국 교육이 강요하는 이미지이다.
북미 – 캐나다의 교육문화는 그런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부적응자 (Misfits) 들을 우대하는 문화가 강한 북미 교육에서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같은 인물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실패를 경험하는 것을 즐기고,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이 북미 교육의 특징이다. 좋은 환경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아닌,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환호한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환경이 다른 두 곳에서 교육방침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모델은 좋은 환경을 타고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고, 좋은 환경을 타고난 사람들은 소수에 속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혹시 본인의 자녀가 한국에서 성공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한국 중∙고등학교 과정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께 굳이 따라잡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적인 학생들은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의 “완벽한 기록”은 깨지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것이고, 미지에 도전하는 순간 그 완벽은 사라질 가능성에 노출된다. 여기 스키를 배우는 학생 A와 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학생은 완벽주의적인 학생이고, 다른 학생은 도전적인 학생이다. 처음엔 둘 다 초급자 코스에서 시작한다. 스키를 타보지 않아도 알겠지만, 초급자 코스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보면 실력은 금방 는다. 보통, 완벽주의적인 사람들은 더 높은 코스에 도전하는 것보다 현재 코스에 남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스키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도전적인 학생은 중급자 코스에 도전한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학생 B를 보며 학생 A는 조소를 날릴 수도 있고, 넘어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안심할 수도 있다. 학생 B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학생 A가 초급자 코스를 반복하다 못해 질려서 중급자에 도전할 때 쯤엔 최상급자 코스에서 다시 열심히 넘어지는 중이다. 학생 A는 초급자 코스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중급자 코스를 가도 넘어지지 않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다시 중급자 코스를 반복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간단하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며 실력이 늘고는 있다. 하지만 완벽한 기록이 결국 무엇이 중요한가? 완벽한 기록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결국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자만을 키운다.
완벽에 대한 강박은 실패를 마주할 때 좌절로 이어진다
스키를 배우는 와중, 비가 내린다. 학생 A는 중급자에서 넘어질 뻔한 자신을 발견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초급자 코스로 돌아온다.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결국 학생 A는 초급자 코스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고, 계속 유지하여 왔던 완벽한 기록은 조그마한 실패 하나로 깨진다. 그간 학생 B가 최상급자 코스에서 열심히 넘어지고 있을 때 자기위로를 삼았던 – 난 한번도 안 넘어지니까 더 높은 코스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 이런 생각은 금방 무너진다. 이런 생각이 무너지면서 실패를 하더라도 높은 코스에 가는게 좋았을까, 하는 의혹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넘어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진 학생A는 학생 B와의 격차를 실감한다. 학생 B는 살인적인 경사 때문에, 빨리 늘지만 아직 부족한 실력 때문에, 그리고 이젠 비 때문에 아직도 넘어지는 중이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다시 일어나서 도전한다.
그리 웃기지는 않은 얘기지만, 이런 비슷한 사례를 고등학교 성적이 높았던 한국 학생들에게 많이 본 적이 있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새로운 환경을 마주했을 때, 학생들이 실패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실패를 이겨내는 학생들과 좌절하는 학생들에겐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실패 그 자체에 충격받는 완벽주의적인 학생들은 계속해서 다가오는 실패의 물결에 충격을 받지만, 도전적인 학생들은 실패 그 자체보다 실패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다. 완벽을 추구하는 학생들은 보통 회복하는 데에 오래 걸리며, 정신을 차렸을 때 실패로 점철되어 있는 성적표를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의 성공이 대학교 저학년의 실패로 이어지고, 저학년의 실패가 결국 실패를 익숙하게 만들고, 커리어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다. 차라리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실패를 겪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실패를 많이 겪었던 사람과 실패한 사람은 다릅니다”
학생들이 꼭 느꼈으면 하는 것은, 실패를 많이 겪었던 것과 실패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이다. 실패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일찍 버릴수록 좋다. 내 대학 생활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3M National Fellowship 상을 타는 것이었다. 캐나다 전국에서 10명의 리더쉽 있는 학생을 뽑는 이 상은 대학교에서 수상자를 추천하게 된다. 수상식때 한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많은 학생들은 코스를 끝내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본인과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 교수님이, 알고 보면 나와 다를 것 없는 학생들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마이크를 넘겨받아 그 교수님께 정중히 대답했다.
“제가 실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실패를 많이 겪었던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은 다르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실패를 겪었을 때 빨리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많은 교수님들이 박수를 보냈고, 그들 또한 많은 실패를 겪고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공유할 수 있었던 마법같은 순간이었다.
누구도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진 않는다. 하지만 실패는 우리 모두가 겪는 것이고,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것은 없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실패한 후 다시 일어서지 않거나,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 칼럼을 마치며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성공을 위해선 실패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한발짝씩 나아가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비범함의 성공은 남들과 비슷하게 접근해서는 이룰 수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전을 멈추기 않게 하고, 이렇게 쌓아올린 도전과, 실패와 경험의 탑은 비범함으로 향하는 계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실패는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 낸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 (John Keats, 1795 ~ 1821) 가 물었듯이, “지성을 교육하고 영혼을 불어넣는데에 얼마나 고통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의 실패에 관한 태도가 독자들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나는 내 농구인생 중 9천번 이상의 슛을 실패했다. 3백개 가까운 경기에서 패배하고, 승패를 결정짓는 슛을 실패한 경우도 26번이나 된다. 나는 인생에서 끊임없이 실패를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성공하는 이유이다.
- 마이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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